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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인류학 표1.jpg

2016. 5. 10 / 121×188mm / 192쪽 /

13,000원 /
ISBN 979-11-952770-6-3 (03380)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

지은이: 데이비드 그레이버

옮긴이: 나현영

“사회는 끊임없이 재탄생한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원리와 기술을 일깨우고
인간에 대한 신뢰를 되찾게 해주는
아나키스트 인류학이라는 ‘낮은 이론’

“자기 삶을 자유롭게 통치하는 세상을 이룩하려는 이들이
정말로 관심을 가질 만한 사회 이론은 무엇인가?
이것이 이 책의 핵심 주제다.”


20대 총선이 끝난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선거 결과를 두고 많은 말들이 오갔습니다.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평가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 선거 결과에 따라 (이를테면 ‘여소야대’냐 ‘여대야소’냐에 따라) 누군가의 삶에 당장 ‘희망’이 생기는 일은 희박합니다. 소외된 이들의 처지나 박해받는 현장의 상황은 여전합니다.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현실에서 살아남느라 힘겨운 이들에게 정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선거 이후 오히려 헛헛하다는 말이 많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자기 삶을 자유롭게 통치하는 세상을 이룩하려는 이들이 정말로 관심을 가질 만한” 탐구, 그리고 “사회는 끊임없이 재탄생한다”고 말하는 사회 이론을 읽어볼 만하지 않나 싶습니다. 인류학자이자 아나키스트 활동가인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력을 시작한 초창기부터 바로 이를 주제로 연구와 활동을 해온 인물입니다. 이 책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에는 자율적인 사회와 정치를 가능케하는 조건에 대한 그의 핵심적 성찰들이 매우 선명하게 간추려져 있습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에 대하여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서구 사회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가진 인물입니다. 최근 국내에도 그의 새로운 저작들까지 여럿(『가치 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부채, 그 첫 5,000년』, 『우리만 모르는 민주주의』, 『관료제 유토피아』) 출간되었습니다. ‘맨스플레인’이라는 말을 세계적으로 알린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의 저자 리베카 솔닛은 그레이버에게 “대단히 눈부시고 독창적인 정치 사상가”라는 찬사를 보냈고, 『21세기 자본론』의 저자 토마 피케티와 그레이버가 벌인 자본주의 시스템과 경제 문제에 관한 논쟁도 유명합니다.
그레이버는 특히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자주 소개됩니다. ‘직접행동 네트워크’ 모임과 ‘세계정의 운동’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였고, 그 탓에 예일 대학교 재임용이 거부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11년 월가를 점거했던 오큐파이 운동에 깊이 참여하며 “우리는 99%다”라는 구호를 작성했던 활동가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그레이버는 인류학을 통해 탐구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원리와 기술’을 사회 이론과 연결시키는 독보적인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교수이자 인류학자인 모리스 블로흐는 데이비드 그레이버를 두고 “이 시대 최고의 인류학 이론가”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왜 인류학인가

인류학 하면 흔히 민속 사료를 살펴보고 원시부족들을 관찰하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인류학의 주요한 질적 연구방법인 민족지학(ethnography)은 실제로 특정 문화권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 생활상의 맥락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여기서 인류학 연구의 가능성을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소수의 엘리트만이 사유체계와 개념을 생산해낼 수 있”다는 식의 “고루한 헤게모니에 맞설 수 있는 최적의 학문”이 인류학이라고 말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인류학이 “인간에 대한 숱한 통념들이 진실이 아님을 입증하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들을 제시하기 때문”이고, 나아가 “인류학이 중요한 것은 단지 통념을 깨뜨려서만이 아니다. 인류학은 우리는 왜 처음부터 정부와 감옥과 경찰을 갖고 있어야 하는지 묻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의 핵심 주제인 “자기 삶을 자유롭게 통치하는 세상을 이룩하려는 이들이 정말로 관심을 가질 만한 사회 이론”을 탐구하는 데 있어 아나키즘의 방식과 인류학의 연구를 긴밀히 연결시켜나가는 이유입니다.

아나키스트 인류학이란 무엇인가

‘아나키스트 인류학’이라는 이름이 낯선 까닭은, 이 말 자체를 그레이버가 창안했기 때문입니다. 아나키스트 인류학은 우선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미래의 어떤 시점에 존재하게 될지 모르는 어떤 급진적 이론”으로 구상되었습니다. 일종의 예시적 이론인 셈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이론은 아나키스트 운동의 주요 원리이기도 한 ‘예시적 정치’(즉, “새로운 제도와 새로운 형식의 사회성을 창출하여 이미 자유로운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직접행동의 원리”)와 나란히 진행될 이론이기도 합니다.

‘낮은 이론’을 찾아서

그레이버는 첫 장을 통해 마르크스주의 학파와 아나키즘 학파의 특징적인 차이를 짚으며 “마르크스주의는 혁명 전략에 관한 이론적이고 분석적인 담론이 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아나키즘은 혁명적 실천에 관한 윤리적 담론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마르크스주의 학파와 달리 아나키즘에는 ‘고급 이론’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아나키즘에서는 명확하고 총제적인 분석을 위한 고급 이론보다 여러 사람 사이에서 의사를 결정하고 합의를 구하는 과정에 관한 이론이 더욱 중요합니다. 아나키즘에 필요한 이론은 고급 이론이 아니라 “변혁을 위한 기획에서 발생하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론”으로서의 ‘낮은 이론’입니다. 이러한 아나키스트 이론은 “다른 사람의 기본 가정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대신 서로를 강화하는 기획”을 찾으려 합니다.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은 이러한 포부로 ‘낮은 이론’의 윤곽을 그리고 있습니다.

대항권력의 인류사, 그리고 사고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상상력

그레이버는 인간 사회는 항상 권력과 동시에 반(反)권력을 내포해왔다고 지적합니다. 어떤 사회든 권력이 존재하면 반권력도 항상 공존한다는 말입니다. 반권력은 ‘대항권력’이라고도 불리는데, 전형적인 정의로 보면 “자치 공동체에서 급진적 노동조합, 민병대에 이르기까지 국가와 자본에 반대하는 사회제도”를 통칭하여 대항권력이라고 합니다. 권력과 반권력이 공존하며 대치하는 상태는 ‘이중권력’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레이버는 이중권력 상태에서 중요한 것은 “상충하는 원리와 모순된 충동들 자체가 아니라 이것들을 중재하는 조정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사회적으로 중요한 것은 갈등 없는 사회라는 목표보다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그레이버가 제시하는 대항권력 이론의 요점은 “대항권력은 이미 깊숙이 우리들 사이에 배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급진적 변혁의 순간에 완전히 새로운 정치, 경제, 사회형태를 도입할 수 있게 하는 대중적 역량의 원천”입니다.
이것은 아주 새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의 독창적인 점은, 대항권력을 이야기하며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 같은 서구의 ‘위대한 혁명’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피아로아족과 티브족과 말라가시 사람들의 사례, 즉 통념상 ‘근대 세계’에 속하지 않는 사회의 사례를 살펴본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탐구는 결국 우리가 알게 모르게 그 안에 갇혀 사고하는 틀, ‘사회’, ‘국가’, ‘국민국가’, ‘혁명’ 등에 대한 사고틀을 무너뜨려야 하는 이유를 일깨웁니다. 대항권력을 제대로 고찰하기 위해서도 통념을 깨는 상상력이 필요한데, 그레이버는 이를 “장벽 무너뜨리기”라고 부릅니다. 장벽 무너뜨리기는 사회적 대안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확장시키는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도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사고의 장벽에는 주로 ‘상상적 총체성’이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앞서 ‘사회’, ‘국가’, ‘국민국가’, ‘혁명’ 등의 개념을 언급했는데, 이에 더해 ‘민족’이나 ‘이데올로기’ 등도 마찬가지로 “총체적 체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믿음에 근거한” 개념들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레이버는 이러한 ‘총체성’들은 실제로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현실’이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정확히 우리 상상적 구조 안에 결코 완전히 포괄되지 않는 무엇을 가리킨다. 특히 ‘총체성’은 언제나 상상의 산물이다. 민족, 사회, 이데올로기, 닫힌계 등등……. 이것들은 모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사회를 움직이는 힘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현실은 항상 무한히 더 복잡한 셈이다.”


그레이버가 강조하는 것은 ‘상상적 총체성’에 갇힌 통념들을 뒤집어보자는 것입니다. 특히나 사회의 대안을 사고할 때 우리는 지극히 저 총체성에 갇혀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근대 사회’가 아닌 인류 사회들의 모습들을 살펴보면, 지금 우리의 현실을 다르게 해석할 근거는 더욱 풍성해집니다. 그레이버는 그 실질적인 방법으로서 ‘사고의 경첩’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이런 것. ‘혁명은 어떻게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이 있다고 할 때, 상상적 총체성에 근거해 혁명을 어떤 지각변동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대신에 질문을 바꿔서 “혁명적 행동은 무엇일까?” 하고 자문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에 답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혁명적 행동은 특정한 권력 또는 지배 형태를 거부하고 그에 맞서 사회관계를 (그 집단 내부에서까지) 재구성하는 모든 집단행동을 일컫는다”라는 답이 가능합니다. 또한 “스스로를 구성하며, 공동으로 규칙이나 운영 원리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재검토하는 자율 공동체를 창조하려는 시도는 거의 혁명에 근접한 행위로 정의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런 ‘혁명’이 반복되면 ‘거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혁명적 행동의 목표가 반드시 정권 전복만일 필요는 없다는 점을 일깨웁니다.

사회는 끊임없이 재탄생한다

인류학은 곧잘 옛날 얘기로 치부되고, 아나키즘은 자주 순진하고 낭만적인 것으로 치부되곤 합니다.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비전을 이야기하면, 이를테면, 갈등이 고도화되고 이전 시대의 상상을 초월하는 자본주의를 경험한 인류에게는 그런 순진한 비전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반박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레이버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인류의 삶은 양적으로는 변화했지만 질적으로는 변하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우리는 이전에 존재했던 사회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에 살고 있지 않으며, 근본적으로 다른 시간에 살고 있지도 않다. 공장이나 마이크로칩의 존재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가능성의 본질이 바뀌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해 서구가 몇 가지 새로운 가능성을 도입했다 해서 오래된 가능성이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나키스트 인류학이라는 예시적 사회 이론은 앞서의 원리들 속에서 “사회는 끊임없이 재탄생한다”고 말합니다. 그레이버는 이에 근거해 이 책에서 “자기 삶을 자유롭게 통치하는 세상을 이룩하려는 이들”을 위한 사회 이론의 조각들을 펼쳐보이고 있습니다.

 

 

차례

서문

‘낮은 이론’을 찾아서
그레이브스, 브라운, 모스, 소렐
이미 존재하는 것과 다름없는 아나키스트 인류학
장벽 무너뜨리기
존재하지 않는 학문의 기본 원리
‘혁명 이후’의 시나리오
내가 배신할 수밖에 없는 인류학

추천의 글 –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와 진심 / 하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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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소개

데이비드 그레이버 David Graeber

인류학자이자 아나키스트 활동가. 뉴욕 주립대학교를 졸업하고 시카고 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예일 대학교, 영국 골드스미스 대학교에서 인류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89년부터 1991년 사이에는 마다가스카르 지역에서 현장연구를 실시했다. 이때의 경험은 이후 연구와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으로 돌아와 ‘직접행동 네트워크’ 모임과 ‘세계정의 운동’ 등에 참여하며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그 이력 탓에 예일 대학교 재임용이 거부되었을 때는 전 세계에서 서명 운동이 일기도 했다. 2011년에는 월가를 점거한 오큐파이 운동에 참여했다. 그레이버는 ‘우리는 99%다’라는 유명한 구호를 작성한 활동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저서로 『가치 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부채, 그 첫 5,000년』, 『우리만 모르는 민주주의』, 『관료제 유토피아』 등이 있다.

옮긴이 나현영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으며, 현재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사야 벌린의 『낭만주의의 뿌리』(공역), 로버트 베번의 『집단 기억의 파괴』, 존 케이지의 『사일런스』, 지그문트 바우만의 『지그문트 바우만, 소비사회와 교육을 말하다』 등을 번역했다.

 

 

추천의 글

그레이버는 “사람들의 습관과 행동에 감춰져 있어 이들 스스로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아나키스트 인류학이라는 방법을 빌려온다. 아나키즘을 어떤 이론의 틀에 가두지 않고 혁명적 실천에 관한 윤리적 담론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이런 방법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기본 가정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대신 서로를 강화하는 기획”이라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 하승우(정치학자)

국가 없이 우리는 살 수 있을까? 그레이버는 이 질문 자체가 틀렸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이미 국가 없이 살아가고 있는데 단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최근 몇 년 동안에 우리를 지켜줄 국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 적지 않은 이들에게 이 책은 국가 없이 사는 기술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되찾게 해줄 것이다.
– 후지이 다케시(역사학자)

 

 

책 속에서

일반적인 설명에서 아나키즘은 흔히 이론적으로는 한발 뒤처지지만 열정과 성실로 두뇌를 벌충하는 마르크스주의의 가난한 사촌쯤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사실 이런 비유는 아무리 좋게 말해도 왜곡된 것이다. 19세기의 이른바 ‘창시자’들은 스스로 특별히 새로운 것을 창안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기조직화, 자발적 결사, 상호부조와 같은 아나키즘의 기본 원리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유구한 인간 행동 양식이라고 생각했다. 국가 및 모든 형식의 구조적 폭력과 불평등과 지배를 거부해야 하며(아나키즘의 문자적 의미는 ‘지배자 없음’이다), 이 모든 형식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서로를 강화한다는 가정도 마찬가지였다. – 39~40쪽

아나키스트 이론은 다른 사람의 기본 가정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대신 서로를 강화하는 기획을 찾으려 한다. 어떤 점에서 통약불가능한 이론들이라 해서 존재할 수 없거나 서로를 강화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유일무이하고 통약불가능한 세계관을 가진 개인들이라 해서 친구나 연인, 공통의 기획에 힘쓰는 동료가 되지 말란 법은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아나키즘에 필요한 이론은 고급 이론보다 오히려 ‘낮은 이론’이라 부를 만한 것일지 모른다. 변혁을 위한 기획에서 발생하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론 말이다. – 46~47쪽

이 책의 제목을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이라 붙인 이유가 여기 있다. 나는 인류학이야말로 우리가 다루는 영역에 특별히 도움이 되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계에 현존하는 자치 공동체와 비시장경제를 조사했던 이들이 사회학자나 역사학자보다 인류학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 민족지학 연구자는 사람들이 하는 일을 관찰하고 이들의 행동에 감춰진 상징적, 도덕적, 실천적 논리를 밝히려 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습관과 행동에 감춰져 있어 이들 스스로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의미를 발견하려 하는 것이다. 급진적 지식인이 맡아야 할 역할도 정확히 이와 같다. 지식인은 실현 가능한 대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관찰해 그들이 (이미) 하고 있는 일의 더 큰 함축적 의미를 찾아낸 뒤, 그 이념을 처방이 아닌 기여로, 가능성으로, 곧 선물로 되돌려주어야 한다. – 50~51쪽

사람들은 말한다. “그래 봤자 원시인들 얘기 아냐?” 인류학을 어느 정도 연구한 아나키스트에게 이런 식의 주장은 매우 낯익다. 전형적인 대화는 주로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회의론자: 좋아, 아나키즘이 실제로 작동한다고 생각할 근거를 대면 아나키즘 사상 전체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정부 없이 존재하는 사회가 가능한 사례를 단 하나라도 들어 줄 수 있어?
아나키스트: 물론, 사례는 무수히 많아. 당장 떠오르는 이름만도 열 가지가 넘지. 보로로족, 바이닝족, 오논다가족, 윈투족, 에마족, 탈렌시족, 베조족…….
회의론자: 다들 그냥 원시인이잖아! 현대 과학기술 사회의 아나키즘을 얘기해달라니까.
아나키스트: 좋아. 성공적인 실험의 예는 아주 다양해. 스페인의 몬드라곤 협동조합 같은 노동자 자주관리 사례가 있는가 하면, 리눅스는 선물경제 이념에 기초한 경제 실험을 했지. 합의와 직접민주주의 원리 위에 세워진 갖가지 정치 조직이 있고…….
회의론자: 그래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그건 모두 소규모의 고립된 운동들 아냐. 나는 사회 전체에 대해 묻고 있다고.
아나키스트: 사회 전체의 변혁을 시도해보지 않았던 건 아니야. 파리 코뮨이나 스페인 혁명만 해도…….
회의론자: 그래,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를 보라고! 다 죽었잖아!

무슨 수를 써도 결과는 똑같다. 이 말싸움에서는 이길 재간이 없다. 회의론자가 ‘사회’라고 말할 때 정말로 의미하는 것은 ‘국가’ 내지 ‘국민국가’이기 때문이다. – 87~89쪽

사실 이 곤봉을 든 남자는 우리가 사는 세계 어디나 침투해 있다. 대다수는 그가 만들어내는 무수한 경계와 장벽을 가로지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기에 그의 존재를 상기할 필요가 없을 뿐이다. 산더미처럼 음식이 쌓여 있고, 그 몇 발자국 옆에 굶주린 여인이 서 있는 광경을 보았다고 하자.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대다수가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광경이다. 그러나 당신은 여인에게 음식을 집어줄 수 없다. 그랬다간 십중팔구 곤봉을 든 남자가 나타나 당신을 때릴 것이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아나키스트는 항상 곤봉을 든 남자의 존재를 상기시키려 한다. 버려진 군사기지를 무단 점거해 살고 있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아니아 공동체에서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벌이는 의식이 좋은 예다. 크리스티아니아 사람들은 산타클로스 분장을 하고 백화점에서 장난감을 훔쳐 거리의 아이들에게 나눠준다. 모두에게 경찰이 산타클로스를 때려눕히고 울부짖는 아이들에게서 장난감을 낚아채는 광경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 132~133쪽

새로운 운동의 핵심 용어는 ‘과정’이다. 여기서 과정은 ‘의사 결정 과정’을 뜻한다. 북아메리카에서 의사 결정은 거의 언제나 합의를 구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기에도 이데올로기적 억압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실상은 그렇지 않다. 모든 바람직한 합의 과정은 타인의 관점 전체를 나와 똑같은 관점으로 바꾸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합의 과정의 목적은 한 집단의 공동 행동 방침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안을 표결로 수락 또는 거부하기보다, 다듬고 또 다듬고, 폐기하거나 다시 고쳐 최종적으로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
– 151쪽

위의 사례들은 결국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민주주의(democracy)’는 본래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엘리트주의자들이 비방을 목적으로 만든 용어로, 문자적으로만 풀이하면 민중의 ‘힘’ 또는 ‘폭력’을 뜻한다. ‘아르코스(archos, 통치)’가 아닌 ‘크라토스(kratos, 힘)’인 것이다. 이 용어를 만든 엘리트주의자들은 민주주의가 단순한 폭동이나 폭민의 지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당연히 그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다른 누군가가 민중을 항구적으로 정복하는 것이었다. (…) ‘민주주의’가 ‘대의(representation)’의 원리를 포함하는 용어로 완전히 탈바꿈하다시피 한 것은 나중의 일이다. (한편 ‘대의’라는 용어는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가 지적하듯 그 자체로 매우 기이한 역사를 갖고 있는데, 이것은 원래 왕 앞에 선 민중의 대표를 뜻하는 말이었다. 즉, 스스로 힘을 행사하는 사람이라기보다 내부의 사절을 지칭하는 용어였던 것이다.) 어쨌든 민주주의는 이렇게 탈바꿈하고 나서야 명문가 출신 정치 이론가들에게 재조명되어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 160~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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