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SBN: 979-11-88501-42-7 (03600)
출간일: 2025년 11월 10일
정가: 33,000원
제본: 무선
쪽수: 376쪽
판형: 186×216mm
분야: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음악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예술일반
침묵
존 케이지의 강연과 글
지은이: 존 케이지
옮긴이: 나현영
책 소개
침묵을 통해 세계를 다시 듣게 하는 책
퍼포먼스, 사운드아트, 개념미술 등의 지적 기초를 낳은 현대적 선언
음악론을 넘어 예술과 삶의 근본적인 의미를 탐구한다
“이 책은 다르게 생각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케이지는 20세기 예술가들이 신경증에서 벗어나는 길을 생각했고, 우리가 거기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한 더 생생하고 덜 경직된 세계를 발견했다. 《침묵》은 이러한 세계로 데려가는 안내서다.”
1961년 《침묵》의 출간은 예술사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된다. 이 책의 출간은 전후 예술의 방향을 바꾼 ‘사상적 사건’이었다. 《침묵》은 존 케이지가 청년기에서 장년기까지 쓴 글 중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글을 망라해 엮은 책이다. 1937년에서 1961년 사이에 쓴 23편의 기고문과 에세이, 강연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에서 케이지는 ‘음악이란 무엇인가?’ ‘왜 작곡을 하는가?’를 질문한다. 케이지는 작곡을 의도나 표현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흐름과 하나인 행위로 다시 정의하고자 한다. 예술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고, 의도가 아닌 우연이며, 유의 생성만이 아닌 무의 생성이라고 바라본다. 케이지는 예술을 세계로부터 분리된 창조 행위가 아니라 세계 그 자체의 울림과 함께하는 활동으로 되돌리려 한 것이다.
케이지는 삶을 산다는 것은 듣는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소리가 차단된 무향실에 있더라도, 청력 기관을 잃더라도, 그럴 때조차 우리는 자신의 신체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이 경험은 죽는 순간까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지속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과 소리는 불가분이다. 이때 소리를 통제하려는 욕망을 버리고 세계의 소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할수록 삶은 더 근사한 것이 된다고 케이지는 주장한다.
케이지는 〈선언〉에서 “곡 하나를 쓴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쓴다. 더불어 〈무에 관한 강연〉에서는 “나는 할 말이 없고 할 말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으며 이것이 내게 필요한 시다”라고 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고, 냉전의 심화와 핵전쟁의 공포를 겪었으며, 사회 분위기가 소비지상주의와 표준화의 열망에 급속히 물드는 것을 경험한 케이지는, 생애 내내 압도적인 ‘큰 것’에 반대했다. 그리고 인간 역시 자아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보았다. 케이지는 자신의 작업들을 무로부터 아무것도 아닌 것을 생성하는 일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폭력에 저항하며 시(時)의 삶을 지속하려는 그의 방식이었다. 케이지는 유(something)가 아닌 무(nothing)라는 토대가 세계의 보편성이라고 천명하면서, 무의 원리에서 유를 생성하는 다양한 실험을 펼쳤다. 케이지는 이 작업들의 궁극적 목적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존재를 세계 속에 개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로써 그가 갈망한 것은 바로 삶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일이었다.
음악뿐 아니라 시와 철학, 무용과 회화, 예술 그 자체의 본질에 질문을 던진 현대의 가장 독창적인 예술론 중 하나로 평가되는 이 책은 지금도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마르지 않는 예술적 경험을 선사한다. 아래는 책에 실린 주요 글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음악의 미래: 크레도〉
이 글은 존 케이지가 이십대 중반이던 1937년에 작성한 초기의 음악적 선언문으로, 그가 이후 평생 동안 추구할 혁신적인 아이디어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미래의 음악에서는 ‘불협화음 대 협화음’이 아닌 ‘소음과 악음(樂音)의 충돌’이 핵심이 될 것이며, 기존 화성학은 소리의 전 영역을 다루는 작곡가에게는 부적절하게 여겨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험 음악〉
이 글에서 케이지는 자신의 음악을 ‘실험 음악’으로 정의하며, 청자에 중심을 두는 태도를 통해 실험 음악의 의미를 확장한다. 작곡가가 아니라 청자의 입장에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음악을 ‘실험적’ 음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실험 음악은 기보되지 않은 소리, 즉 주변에서 우연히 발생하는 소리의 세계로 문을 열어 놓고 있다.
〈실험 음악: 법요〉
이 글은 케이지의 선(禪) 사상이 깊이 반영된, 그의 음악적 방법론에 대한 가장 명료한 교리적 진술 중 하나다. 케이지는 ‘실험적’이란 단어가 성공과 실패로 판단되는 행위가 아니라 단지 그 결과가 정해지지 않은 행위에 대한 기술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명확히 정의한다. 작곡가가 “의도와 비의도를 구별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주관-객관, 예술-삶 등의 이분법이 사라지고 소재(소리)와의 합일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프로세스로서의 작곡〉
- I. 변화
- II. 불확정성
- III. 소통
“I. 변화”에서는 케이지의 작곡 철학이 어떻게 통제에서 해방으로, 결과에서 과정으로 이동했는지를 보여준다.
“II. 불확정성”에서는 케이지 자신의 작품뿐만 아니라 동료 작곡가들의 작품을 분석하며, 작곡가의 통제가 풀리고 연주자에게 자유와 책임이 부여되는 다양한 방식을 논한다. 작품의 어떤 요소가 확정적이고 어떤 요소가 불확정적인지에 따라 연주자의 역할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비교 분석하며 비이원론적 사상을 심화시킨다.
“III. 소통”에서는 케이지의 작곡 철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음악의 본질’과 ‘소통의 의미’를 다룬다. 일련의 선문답 같은 질문과 인용을 통해 서구 전통에서의 ‘소통’ 개념을 해체하고, 예술을 무목적인 삶의 과정으로 재정의한다. 무위(無爲)와 원융무애(圓融無礙)와 같은 동양적 관점을 제시한다.
〈작곡법〉
- 〈주역 음악〉과 〈상상의 풍경 4번〉에 사용된 작곡 프로세스를 설명한다
- 〈피아노를 위한 음악 21~52〉에 사용된 작곡 프로세스를 설명한다
케이지가 ‘우연성 작업’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주역 음악〉과 〈상상의 풍경 4번〉의 작곡 프로세스는 《주역》의 점괘를 통해 이루어졌다. 케이지는 작곡가의 주관을 완전히 배제하고 소리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우연성 프로세스의 목표는 작곡가 개인의 취향, 기억 등의 심리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다.
〈피아노를 위한 음악 21~52〉는 이전의 엄격한 우연성 기법에서 한 단계 나아가 그래픽 기보와 불확정성 연주를 결합한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의 작곡법은 투명 종이에 무작위로 표시된 흠집의 위치를 마스터 페이지와 중첩하여 음표를 결정한 후, 우연성 작업으로 연주 기법을 지정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에서는 작곡된 기보가 완성된 후에도, 연주에 관한 다수의 상황은 결정되어 있지 않다. 이로 인해 연주자는 극도의 자유를 얻게 된다. 여기서 케이지는 이러한 경우 “과연 무엇이 작곡된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현대 음악의 전조〉
이 강연은 음악의 목적, 구조, 기법 등 전통적인 정의를 재검토하고, 무조성 이후 현대 음악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케이지는 서구 음악의 두 가지 중심축인 구조와 형식을 대립되는 요소로 설명하고, 화성 구조의 해체로 인한 무조성 등장의 의미를 분석한다.
〈미국 실험 음악의 역사〉
과거와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소리 그 자체를 추구하는 미국 실험 음악의 맥락과 철학을 규정한다. 케이지는 이 글에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선형적 시간관을 거부하고, 우연성 작업과 불확정성 연주를 통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을 하는 익명성의 음악을 옹호한다. 케이지가 규정하는 실험 음악의 최종 목적은 개인의 표현이나 예술적 기교와 취향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에릭 사티〉
에릭 사티의 음악과 철학을 분석하며 케이지 자신의 실험 음악 미학을 정립하는 글이다. 케이지는 사티를 전통적 예술 개념을 거부하고 무관심에서 ‘소리 그 자체’를 이끌어낸 선구자로 해석한다. 사티가 제안한 ‘가구 같은 음악’은 케이지의 불확정성 음악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케이지가 사티에게서 발견한 ‘무목적성’과 ‘주변 환경의 수용’은 케이지 자신의 불확정성 음악과 〈4분 33초〉 등의 작곡에 직접적인 사상적 배경이 된다.
〈에드가르 바레즈〉
케이지는 에드가르 바레즈가 모든 가청 현상을 음악의 소재로 받아들이고 소음을 도입함으로써 현대 음악사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케이지는 바레즈의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개인적 상상력이 소리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필요성과는 불일치한다고 보는 비판적 시각을 드러낸다. 케이지에게 있어 바레즈는 20세기 음악의 본질을 확립한 선구자이지만, 그의 작곡 방식은 여전히 과거의 예술가적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무용에 관한 네 편의 소고〉
- 목표: 새로운 음악, 새로운 무용
- 우아함과 명료함
- 오늘날……
- 음악과 무용에 관한 2쪽의 지면과 122개의 단어
“목표: 새로운 음악, 새로운 무용”에서 케이지는 타악기 음악을 통해 소리와 리듬을 해방하고, 이를 통해 음악이 단순한 무용의 반주가 아닌 무용의 불가결한 일부가 되는 새로운 협력 관계를 모색한다. 케이지는 19세기 음악이 낡은 소리의 변주와 동일한 리듬에 갇혀 있다고 보고, 타악기 음악을 통해 이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아함과 명료함”에서 케이지는 현대 무용의 위기를 진단하고, 그 위기의 해결책을 모든 시간 예술의 본질인 리듬 구조의 명료함과 우아함의 이원적 상호작용에서 찾는다. 케이지는 현대 무용이 개인의 개성이라는 빈약한 토대에 기대고 있으며, 발레, 재즈, 인도 음악/무용 등 다른 시간 예술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생명의 비밀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케이지는 현대 무용이 무르익기 위해서는 명료함(구조)과 우아함(형식)을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에서는 머스 커닝햄 무용단과의 공동 작업을 설명하며 음악과 무용의 독립을 통해 ‘삶 자체의 긍정’을 추구하는 새로운 예술 형식을 천명한다.
“음악과 무용에 관한 2쪽의 지면과 122개의 단어”는 불확정성 철학과 개념 예술의 미학을 극도로 압축하여 표현한 글이다.
〈로버트 라우션버그, 예술가와 그의 작품에 관해〉
로버트 라우션버그의 혁신적인 예술, 특히 콤바인 회화에 대해 쓴 심층적인 분석이자 헌사이다. 케이지는 라우션버그를 ‘예술과 삶 사이의 간극에서 행동’하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예술로 수용함으로써 미술의 전통적 개념을 해체한 선구자로 평가한다. 케이지는 라우션버그의 작품을 단순히 콜라주나 구성으로 보는 것을 넘어, 만물이 우발적으로 모인 장소이자 혼돈 상태에 있는 현실 그 자체로 해석한다. 케이지는 라우션버그의 작품을 경험하는 것이 보는 습관을 점검하고 새로운 눈의 사용법을 배우는 일이 된다고 말한다.
〈무에 관한 강연〉
이 강연은 케이지의 불확정성의 미학과 선(禪) 철학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핵심 텍스트 중 하나로, 형식과 구조를 통해 오히려 무 그 자체와 현재 순간의 경험을 강조하는 개념적 연설이다. 이 강연은 케이지의 음악처럼 엄격하게 계산된 시간 구조를 따르면서도, 내용은 ‘할 말이 없다’는 선언과 자전적 일화, 우연한 사색으로 채워져 있다. 케이지는 강연의 시작부터 말의 목적이 침묵의 생성을 돕는 데 있음을 선언하며, 전통적인 사상 전달의 역할을 거부한다. 강연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내용의 무목적성과는 대조적으로 시간의 간격이 엄격하게 조직되어 있다는 점이다. 케이지는 예술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소유 개념을 거부함으로써 자유를 획득하고 순수한 생명을 경험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이 강연은 케이지의 예술이 무언가를 전달하려는 의도 대신 경험 그 자체를 제공하려 했음을 보여주며, 침묵과 구조를 통해 현재의 소리와 존재에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유에 관한 강연〉
이 강연에서 케이지는 작곡가 모턴 펠드먼의 음악을 중심으로 유와 무의 관계, 예술가의 역할, 그리고 삶의 태도 등을 논한다. 시작에서 “이것은 유에 관한 강연이며 당연히 무에 관한 강연이기도 하다”고 명시하며, 무와 유가 어떻게 서로 대립하지 않으며 전진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가를 주제로 삼는다. 펠드먼의 음악을 ‘유와 무의 수용’이라는 케이지 자신의 철학과 연결하며, 궁극적으로는 삶 자체에 대한 통제와 소유를 내려놓고 그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삶의 태도를 역설한다.
〈한 명의 화자를 위한 45분〉
이 낭독 텍스트는 음악, 강연, 연극의 경계를 허무는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글은 우연성 기법을 사용하여 작성되었으며, 전통적인 음악의 경계를 넘어 모든 소리를 포용한다. 우연성과 더불어 무목적성을 강조하며, 예술과 삶을 분리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케이지는 우연성을 통해 소리, 침묵, 연극적 요소 들을 통합하고, 통제와 목적을 거부하며, 삶의 모든 순간을 예술적 사건으로 확장하고자 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또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글은 제목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 전통적인 의미의 논리적인 답변을 제공하기보다는, 그 자체로 예술적 행위이자 질문에 대한 탐구의 과정을 보여준다. 케이지는 질문에 대해 직접적이고 명료한 답을 주기보다는 역설, 비유, 그리고 일상적인 관찰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한다. 케이지는 우리가 특정한 목적지나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무한한 우주’로, ‘미지의 세계’로 향하고 있다고 말한다. 케이지의 관점에서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답은, 정해진 목표 없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모든 규칙을 깨고 모든 방향으로 탐험하는 행위 그 자체이다. 케이지는 고정된 목적지보다 움직이는 과정에, 명확한 의미보다 혼돈의 수용에 중점을 둔다.
〈불확정성〉
이 글에는 90개의 짧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일화들은 케이지의 불확정성 개념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며 예술, 삶, 우연, 질서와 혼돈 등의 주제를 다룬다. 일관된 서사라기보다는 단절되고 독립적인 경험들을 모아놓은 형식이다. 이 짧은 이야기들은 삶 자체가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 불가능한 일화들의 집합임을 보여준다.
〈음악 애호가들을 위한 현장 안내서〉
이 글은 케이지의 음악관, 미학, 그리고 삶에 대한 태도를 특유의 유머와 아이러니를 통해 드러내며, 음악과 버섯이라는 두 가지 관심사를 병치하여 논리를 전개한다. 존 케이지는 버섯 채집과 균류학에 대한 열정을 음악과 예술에 대한 그의 철학을 설명하는 은유적 틀로 사용한다. 케이지에게 버섯 채집은 일종의 수행이며, 자연 속에서 예술과 삶의 불확정적인 본질을 확인하는 행위다. 그는 음악 애호가들에게 기존의 틀을 벗어나 우연과 무목적성을 수용할 것을 제안한다.
지은이 소개
존 케이지 John Cage
“모든 사건들이 결정적이었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만들었으며, 일어난 모든 일과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나를 만들고 있다.”_ 존 케이지
존 케이지는 “음악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시대를 초월한 가장 ‘현대적’인 작곡가이자 예술가, 사상가가 된 인물이다. 그는 191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발명가 아버지와 언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퍼모나 대학에 다니다가 일률적인 교육 제도에 충격을 받은 그는, 새로운 경험을 찾아 떠난 유럽에서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수많은 사건들이 동시에 한 인간의 경험 속에 얽혀 즐거움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현대 건축, 미술, 음악 등등에 두루 관심을 가졌지만, 프랑스 파리에서 한 유명 건축가에게 “건축가가 되려면 건축에 일생을 바쳐야” 한다는 말을 듣고 건축 공부를 그만둔다. 그러나 미국으로 돌아와 현대 음악의 선구자 아널드 쇤베르크에게 같은 질문을 받고는 기꺼이 그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화성학에 전혀 소질이 없었던 케이지에게 쇤베르크는 그가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혀 평생 음악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케이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렇다면 그 벽에 머리를 박는 데 일생을 바치겠습니다.”
타악기에서 미래의 음악의 가능성을 엿본 케이지는 작곡가 생활 초기 주로 무용에 사용할 타악기 음악을 작곡하며 생계를 잇는다. 1940년대 초 그는 무용가이자 안무가 머스 커닝햄을 만나 인생의 동반자가 된다. 이 시기 케이지의 혁신적인 발명품 중에는 그랜드 피아노 현 위에 나사나 볼트, 틈막이 등의 이물질을 부착해 타악기처럼 만든 ‘프리페어드 피아노’가 있었다. 이미 일찍이 선(禪)에 관심을 갖고 있던 케이지는 서구 세계에 불교를 전파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스즈키 다이세쓰와 함께 공부하며 소리를 작곡가의 기억 및 호불호로부터 해방시키는 비의도적 작곡 방식을 연구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주역》으로 점을 쳐 음높이, 음길이, 강약을 비롯한 소리의 모든 측면을 결정한 〈주역 음악〉이다. 1952년에 발표한 〈4분 33초〉는 그의 실험이 절정에 이른 곡이다. 《주역》으로 곡의 길이만을 결정하고 나머지를 모두 배제한 이 곡에서 연주자가 피아노 뚜껑을 열고 닫는 동작만을 취하는 동안, 청중은 공연장에 가득한 기침 소리, 바람 소리, 먼 소음 등을 듣게 된다. 케이지는 침묵을 통해 우리가 세계를 다시 듣게 만들었다.
케이지는 일상의 우연, 예기치 못한 만남, 버섯 채집 같은 자연의 경험을 예술적 사유와 연결한다. 이 책에는 음악만큼이나 버섯 얘기가 유달리 많이 나오는데, 케이지는 “버섯은 짧은 시간에 자라기 때문에 우연히 그것이 신선할 때 마주친다면 그것은 마치 짧은 시간 생명이 있는 소리와 마주치는 것과 같다”고 말하며 숲속을 거닐면서도 자신의 침묵의 작품을 연주한다. 예술은 곧 삶이며 발견의 과정임을 주장한 그는 수많은 예술 운동에 영향을 끼쳤으며, 오노 요코, 백남준 등 플럭서스 운동을 이끈 예술가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 주었다.
1961년 출간된 《침묵》은 이전까지 케이지가 했던 그 어떤 활동보다 케이지를 유명하게 만든 책이다. 그가 1937년부터 1961년 사이에 쓴 기고문과 에세이, 강연문 등을 엮은 이 책은 음악뿐 아니라 시와 철학, 무용과 회화, 예술 그 자체의 본질에 질문을 던진 현대의 가장 독창적인 예술론 중 하나로 평가된다.
변혁에 목말랐던 새로운 세대에게 그의 책은 신성한 텍스트와도 같았으며, 현재까지 무수한 번역판을 포함해 약 50만 부 이상이 팔린 이 책은 지금도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마르지 않는 예술적 경험을 선사한다.
옮긴이 소개
나현영
포도밭출판사의 나선형 시리즈에서 SF, 생태, 포스트휴머니즘을 주제로 다양한 책을 기획하여 번역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지그문트 바우만, 소비사회와 교육을 말하다》, 《무정한 빛》,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 등이 있다.
본문 중에서
곡 하나를 쓴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_37쪽
그러나 귀를 기울이면 그 안에도 매혹이 있다.
_41쪽
텅 빈 시간이나 텅 빈 공간 따위는 없다.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보고 또 듣는다. 실제로 침묵을 구현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공학적 목적으로 최대한 조용히 만든 방을 무향실(無響室)이라 하는데, 여섯 개의 벽면이 특수 소재로 만들어진 이 방에서는 소리의 반향이 일어나지 않는다. 몇 년 전 하버드 대학교 무향실에 들어간 나는 두 가지 소리를 들었다. 하나는 높은 소리 하나는 낮은 소리였다. 담당 엔지니어에게 설명하자 그는 높은 소리는 내 신경계가 작용하는 소리, 낮은 소리는 내 혈액이 순환하는 소리라고 알려 주었다. 죽을 때까지 소리는 나를 떠나지 않는다. 죽은 후에도 소리는 계속될 것이다. 음악의 미래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_46쪽
그러나 미래에 대한 이 자신감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소리는 발생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갈림길에서 의도하지 않은 소리를 택한 이들의 몫이다. 이 전회(轉回)는 심리적이며 처음에는 인간적 특성을 포기하는 것처럼, 음악가의 입장에서는 음악을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심리적 전회는 우리를 자연으로 인도해 이 세계에서 인간과 자연은 둘이 아닌 하나이며 모두를 놓아 버린다 해도 잃는 것은 없음을 서서히 또는 갑자기 깨닫게 한다. 아니, 사실은 전부를 얻는다.
_46쪽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소리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 복잡한 음악적 기법을 사용해 새로운 가능성과 인식의 근사치에 도달할 수 있다. 아니면 아까 말한 것처럼 소리를 통제하려는 욕망을 버리고 음악에 대한 생각을 비운 뒤, 인간이 만든 이론이나 인간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로서보다 소리를 소리 자체로 표현할 수단을 찾는 일에 착수할 수도 있다.
_47쪽
소리의 명확히 정의된 대립물은 침묵이며 음길이는 침묵을 측정할 수 있는 유일한 소리의 특성이므로, 소리와 침묵을 포함한 모든 타당한 구조는 서양의 전통대로 진동수가 아니라 음길이에 기초해야 한다.
_52쪽
소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나 소리 없이 삶은 단 한순간도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_53쪽
무목적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예컨대 침묵에는 무슨 일이 생길까? 다시 말해 침묵에 대한 마음의 인식은 어떻게 바뀔까? 예전에 침묵은 소리와 소리 사이의 간극으로 다양한 목적에 유용하게 쓰였다. 그중에는 고상한 편곡을 목적으로…… 위의 목적을 비롯해 다른 목적이 전혀 없는 경우 침묵은 무언가 다른 것, 즉 침묵이 아니라 차라리 소리, 주변 음이 된다…… 이 귀가 아무 할 일이 없는 마음과 결합할 때 그 마음은 자유롭게 청취의 행위로 들어가 각 소리를 많든 적든 선입관의 근사치인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듣게 된다.
_62~63쪽
음악 그 자체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이상적 상황임이 분명해진다. 인간의 마음은 주변 음, 88개 피아노 건반 이외의 음높이, 셀 수 없는 음길이, 비음악적이거나 불쾌한 음색을 무시하고,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경험을 이해하고 통제하는 데 쓰일 수 있다. 또는 마음은 창조 능력을 향상시키려는 욕망을 포기하고, 경험의 충실한 수신기로 기능할 수도 있다.
_72쪽
나는 할 말이 없고 할 말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으며 이것이 내게 필요한 시다.
_168쪽
나는 반쯤은 관념적으로 반쯤은 감상적으로, 전쟁이 났을 무렵, 조용한 소리만을 사용하겠다고 다짐했다. 세상에서 무엇이든 큰 것에는 진실도, 선도 없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조용한 소리는 고독, 또는 사랑 또는 우정과 닮아 있었다. 내 생각에, 영원, 그리고 가치는, 적어도 《라이프》, 《타임》 그리고 코카콜라와는 무관했다.
_177쪽
수용보다 창작에 책무를 느끼는 작곡가는, 그 시점에 유행하는 깊이를 암시하지 않는 모든 사건을 가능성의 영역에서 배제해 버린다.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고, 또 그렇게 평가받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사랑을 축소하고 두려움을 키우며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염려하는 것이다. 이런 작곡가는 무수히 많은 문제에 부딪힌다. 그의 작품은 어느 누구의 작품보다 더 뛰어나고, 더 인상적이며, 더 아름다워야 한다. 이것, 이 아름답고도 심오한 대상, 이 걸작은 삶과 정확히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 관계는 다름 아닌 유리된 관계다.
_192쪽
모든 유는 무의 메아리다.
_194쪽
일단 정말로 듣기 시작하면 누구도 생각을 할 수 없다.
_258쪽
우리가 하는 일의 본질은 개선이 아니다. 생성하고, 지속하고, 존재를 벗어나 침묵하는 일, 바로 무위다.
_312쪽
차례
출간 50주년 기념판 서문
서문
선언
음악의 미래: 크레도
실험 음악
실험 음악: 법요
프로세스로서의 작곡
- I. 변화
- II. 불확정성
- Ⅲ. 소통
작곡법
- 〈주역 음악〉과 〈상상의 풍경 4번〉에 사용된 작곡 프로세스를 설명한다
- 〈피아노를 위한 음악 21~52〉에 사용된 작곡 프로세스를 설명한다
현대 음악의 전조
미국 실험 음악의 역사
에릭 사티
에드가르 바레즈
무용에 관한 네 편의 소고
- 목표: 새로운 음악, 새로운 무용
- 우아함과 명료함
- 오늘날……
- 음악과 무용에 관한 2쪽의 지면과 122개의 단어
로버트 라우션버그, 예술가와 그의 작품에 관해
무에 관한 강연
유에 관한 강연
한 명의 화자를 위한 45분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또 무엇을 하고 있는가?
불확정성
음악 애호가들을 위한 현장 안내서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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